루드빅은 농담 한마디로 인해 트로츠키주의로 몰리게 되어 당에서 축출된다. 자신은 누구보다 당을 사랑하고 당원으로써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지만, 다수에 의해서 이런 자신의 실체가 부정당하고만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내가 아니라 나에 대한 주위의 판단이 실제가 되고 만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내 모습이 진짜인가 타인이 바라보는 내 모습이 진짜인가. 사회에서 온갖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우리는 타인이 바라보는 내 모습이 실제가 되어버릴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사회에서 부정당하는 것은 살 수 없음을 뜻한다. 관계로부터 고립되어 혼자서의 삶에는 우리가 살아갈 어떠한 의미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루드빅은 당에서 축출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자신의 친구, 제마넥에 대한 분노와 증오로 가득찬 삶을 살게 된다. 그것은 너무도 강렬해서 그 하나의 목표만을 바라보며 그 어떤 것보다 우선되어 진다. 하지만 결국, 그 목표를 이루었다 하더라도 그 뒤에 남는 것은 허탈감 뿐이다. 그 이후의 삶은 방향을 잃어버린 채 표류하게 될 공산이 크다. 더군다나 그런 목표가 부정당하는 것이라면(상대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그저 지나간 일일 뿐이고, 화해의 악수를 먼저 청한다면) 지금까지 자신의 삶이 모두 부정되어 버려, 더 고통스러울 수 밖에 없다. 당에서 쫓겨난 이후의 삶의 모습들은 오로지 제마넥에게 고통을 가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에, 루드빅은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한 것이다. 어쩌면 당에 맹목적인 헌신이 있었던 과거의 삶과 별다를게 없을지도 모른다. 결국 근본적으로 루드빅의 삶에서 자기 자신은 없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당이 있었고, 이 후 당이 빠진 자리에 복수만이 가득차 있었다.
루치에에 대한 루드빅의 사랑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이기적이었다. 그의 감정에만 충실했고, 사랑의 행위에만 집착하게 된다. 루치에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아픔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삶을 살아 왔었는지, 그녀를 온전히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루드빅의 사랑은 미숙하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을 읽으면, 군데 군데 작가의 통찰이 묻어나는 부분들을 발견하게 된다. 심한 공감을 일으키게 되는 구절을 만나는 것은 그의 소설을 읽는 재미다.
<젊은이들이 연기를 하는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삶은, 아직 미완인 그들을, 그들이 다 만들어진 사람으로 행동하길 요구하는 완성된 세상 속에 턱 세워놓는다. 그러니 그들은 허겁지겁 이런저런 형식과 모델들, 당시 유행하는 것, 자신들에게 맞는 것, 마음에 드는 것, 등을 자기 것으로 삼는다. - 그리고 연기를 한다.>
젊은이들이 우울해지는 이유는 기득권이 가득 쥐고 있는 세상으로 비집고 들어가기가 녹록치 않아서이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른다. 자기 자신에 대한 고민을 할 겨를도 없이, 사회에 내던져진다. 자기 중심을 잡지 못한 채, 세상이 원하는데로 이리저리 휘둘리며 살아간다. 간신히 사회에 발 붙이고 구석진 자리를 잡아 섰을지라도, 그 자신의 속이 비어있다. 자신의 속을 채워놓을 방법도, 여유도 갖지 못했다. 내가 나이지를 못하고, 그냥 사회의 구성원으로써 남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겉으로 자신을 꾸미려 하면 할수록 젊은이로써의 매력을 버리고 기성인의 모습을 닮아갈 뿐이다. 나 또한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기에, 어줍짢은 자리를 하나 잡고 버티면서 살고 있기에, 그리고 그렇게 살아지고 있기에, 이 글을 읽으며 심히 공감이 되면서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이다.
![]() | 농담 - ![]()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민음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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