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어느 금요일 저녁이었다. 아내와 잠실 야구장 외야석에 널찍하게 자리를 차지한 채, NC가 승기를 잡아가는 경기를 지켜보며 치맥을 먹고 있었다. 그러다 어떻게 부산 얘기가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눈부신 경기장의 조명 아래에 움직이는 선수들을 보면서 즉흥적으로 결심했다. 지금 바로 부산으로 가자고.
경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우리는 경기장을 나와 집으로 향했다. 씻고 짐을 챙기려면 버스 시간을 놓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후다닥 씻고, 대충 당일로 놀러갔다 올 만큼의 가벼운 짐을 챙겨서, 밤 11시쯤 동서울 터미널로 향했다.
버스에 타자마자 어떻게 내려왔는지도 모를만큼 골아 떨어졌고, 눈을 떠보니 이미 부산이었다. 아직 해가 뜨려면 한시간은 더 있어야 할 시간이었다. 롯데리아에 가서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한잔 시키고, 30분을 빈둥거리며 첫차가 다니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차가 다니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전철을 타고 해운대로 향했다.
그 시간의 해운대 풍경은 지난 금요일 밤이 범상치 않았음을 충분히 짐작하게 했는데, 고삐풀린 젊음이 배설해 놓은 갖가지 쓰레기와 아직 술이 덜 깬 청춘들이 아침 바닷 바람에 이리저리 쓸려 다니는 모습이었다. 우리는 해변으로 가서 조금 걷다가 밀려오는 파도에 뭐가 그리 즐거운지 희희덕 거리며 놀다가 금방 지쳐서 따뜻한 커피에 대한 강한 욕구로 가까운 까페로 갔다. 거기서 또 한두시간 죽치고 있으면서 체력을 충전했다.
그 까페에서 잡지 한권을 꺼내어 읽었는데, 중간에 재미있는 에세이 한편을 발견했었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파리에 살고 싶어 했던 사람이었는데, 결국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10년째 같은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 10년 차에 결국 한달 간의 안식 휴가를 얻어 프랑스로 여행을 갔는데, 거기에서 우연히 키스 자렛의 기념 공연을 보러 갔고, 숲으로 둘러쌓인 야외 공연장의 축축한 분위기 속에서 음악에 온전히 몰입하여 연주하는 그의 모습과 쉴틈없이 지저귀던 새소리가 더해져 더없이 완벽한 하모니를 이루었고, 그 순간이 너무나 행복했다는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10년 만이지만 한달간의 안식 휴가가 있는 것이 부럽기도 했고, 그 기간을 이용해서 남편과 해외 여행을 가는 것도 부러웠고, 우연히 키스 자렛의 공연을 보게 되었다는 것도 너무 부러웠다.
그리고 몇달 후, 우연히 크레마 E-book 리더기로 도서관에서 '모든 요일의 기록' 이라는 책을 빌렸다. 머리가 나빠 본인이 쓴 문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카피라이터의 글이 었는데, 부산에서 읽었던 잡지의 글이 생각났다. 리스본에 여행을 가서 5일을 동네의 한 바에서 현지 사람들과 하나가 되어 음악을 즐기고 그들의 삶과 동화된 경험을 하고 왔다는 글을 읽을 때, 그땐 좀 더 진하게 부산에서 읽었던 글의 냄새가 났다.
그리고 한 꼭지를 더 읽어넘기자 부산에서 읽었던 그 키스 자렛의 이야기가 나왔다. 역시, 어딘지 모르게 익숙하다 생각했었는데, 같은 사람의 글이었다니, 참 신기했다. 책의 저자처럼 소설을 읽으면 책의 내용도 주인공의 이름도 기억 못하는 내가 그때 부산에서 읽었던 글의 느낌과 여운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고, 그 분의 책을 읽었을 때 다시 그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었다.
읽고, 듣고, 바라보고, 경험하는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에 대한 책이었다. 그리고 이 책은 또 그 기록 중의 하나일 것이다. 정말 우연히도 어제 페이스북을 보면서 다이어리를 쓰는 것에 대한 글도 읽었는데, 그사람이 하는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 였다. 다이어리에 계획을 쓰는 것이 아니라, 어떤 글이든 그림이든 그냥 자신의 느낌과 하고 싶은 이야기, 온갖 생각들을 끄적여 보라고. 그리고 여행지에서 하나의 다이어리를 들고가서 또 그렇게 끄적여보면서 하나의 자신만의 여행책을 만들어 보라고.
참 쉽지는 않을 것 같은데, 또 몇일 하다가 안할 것 같긴 한데, 나도 끄적여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렇게 이 글도 끄적여 보고 있다.
![]() | 모든 요일의 기록 - ![]() 김민철 지음/북라이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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