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한 한 편하게 살고자 하는 바람은 모든 인간의 고유한 관심사다. 그리고 아주 힘든 어떤 업무를 수행하든 수행하지 않든 수입이 거의 똑같다면, 그 사람은 허용되는 한에서 아주 부주의하고 어설프게 그 일을 할 것이다.'
애덤 스미스는 일에 있어서 인간의 본성에 대해 위와 같이 판단하였다.
사실 나도 직장 생활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은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자본가를 위해 소중한 시간을 갖다 바치며, 그들의 수익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가로 자본가의 돈 일부를 받는다. 아주 일부를.
생계를 걱정할 필요가 없어서 일을 안할 수 있다면, 안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굳이 내 소중한 시간을 그들의 수익을 위해 쓸 필요가 없기 떄문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나는 자본가가 아니고 생계를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직에 소속되거나 고용되어야 한다. (스스로 회사를 차릴만큼의 능력도 없거니와 리스크를 지고 싶지도 않다.) 결국은 내 시간과 에너지를 대가로 지불하고 돈을 벌어야 하는데, 따지고 보면 이러한 삶의 방식으로는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스스로의 가치와 행복을 위해서가 아닌, 단순히 돈의 교환 가치로서 사용하는 것이다. 매우 슬픈 인생이 아닐 수 없다. 그러한 시간을 조금이나마 나에게 가치있게 사용할 수는 없을까.
책에서 사회 과학의 아이디어, 혹은 인간에 대한 어떠한 믿음 등을 이데올로기라고 부르는데, 그것이 옳든 그르든 관계없이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막강하다고 한다. 애덤 스미스가 예상했던대로, 노동자들이 일을 하는 이유는 오직 돈을 벌기 위해서라고 정의하는 순간, 노동자들은 자기가 일하는 일터에서 수동적인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그들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 마지못해 일터에 나오게 되는 것이고, 그들의 동기부여를 위해서 관리자는 더 효율적이고 규칙적인 제약사항을 만들 것이다. 그들은 더 나은 회사를 만들기 위해 스스로 창의적으로 탐구하고, 더 제품을 개선하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는 존재가 아니기 떄문이다. 그런식으로 사회의 이데올로기가 팽배해지는 순간, 자신의 위치에서 나름 창의적이고 헌신적으로 일하는 사람조차도 그러한 규칙에 사로잡혀, 일반적인 노동자처럼 행동하게 될 것이다.
인간 본성에 대한 이데올로기, 또는 사회에 어떤 이론이 팽배해있는지 따라, 사회구성원들의 삶이 극명하게 달라지게 된다. 전체적으로 우리는 여전히 애덤 스미스가 이야기한 그러한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는 듯 하다.
반면에 직업 의식, 소명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 병원에서 청소를 하는 직원이 단순히 업무 지침서의 항목들을 따르는 게 아니라, 내가 하고 있는 일로 인해 환자와 그 가족에게 위로가 될 수 있음을 인지하며 일을 하는 사람이 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사회와 누군가에게 가치를 주는 일이라면, 좀 더 적극적이고 창의적으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가치와 목표를 위해, 좀 더 창의적인 방법을 찾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어느정도의 자율성이 확보가 되어야 한다. 단순히 개인의 노력으로 그러한 소명을 가지는 것에는 한계가 있고, 조직이 직원에 대해 어떠한 인식을 가지고 정책을 시행하는 지가 더욱 중요한 요인이다.
'몇가지 단순한 작업을 하며 인생을 보낸 사람은...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한 방편을 찾는 데에 스스로 이해력을 발휘하거나 창의력을 발휘할 기회를 갖지 못한다. 어려운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연스럽게 그러한 능력을 발휘하는 습관을 잃어버리며 보통은 인간으로서 될 수 있는 가장 어리석고 무지한 사람이 된다.'
새로운 무언가를 시도할 때, 이 사실을 크게 느끼게 된다. 예전에 여행지에 혼자 남겨졌을 때와 집을 거의 새로 짓다시피 했을 때, 나에게 주어지는 선택지에 대해서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었다.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바보같은 모습에 실망했었다. 안락한 사무실에 앉아서 주어지는 일만 하면서 지낼 때는 그런 티가 전혀 나지 않지만, 내가 일하고 있는 범주에 조금이라도 벗어난 미션이 주어지면, 그때부터는 허둥대기 시작하는 것이다. 애덤 스미스가 말했듯이, 그러한 무지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새로운 도전과 기회 속에 나를 자주 노출시켜야 될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유명한 연구가 있다. 아이들 중 일부는 '성과목표'라고 부르는 목표를 지니고 있는데, 이러한 아이들은 시험을 잘 보고 싶어하며, 사회적 인정을 바란다. 그리고 '숙달목표'라고 부르는 목표를 지니는 아이들도 있는데, 이들은 자신이 잘하지 못하는 것에 부딪혀 실패로부터 배우기를 바란다. 연구에 따르면 성과지향의 아이들은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고 싶어하고, 숙달 지향 아이들은 자신의 능력을 '개선'하고 싶어한다. 성과 지향의 아이들은 도전을 피하고, 숙달 목표를 지닌 아이들은 도전을 추구한다. 오랜 시간이 지났을 떄, 학업의 성취도가 높은 아이들은 당연히 숙달 지향의 아이들이다.
이것은 아이들의 교육에서만 나타나는 내용은 아닐 것이다. 직장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것이다. 우리 주위에도 매년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배우는 것을 즐기는 이가 있는가 하면, 5년차의 업무 능력과 지식을 20년간 되풀이하는 직장인도 있다.
그렇다면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 어떻게 직장에서 창의성을 발휘하고, 의미를 찾으면서 일할 수 있을까?
항상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왜? 무엇을? 어떻게? 일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해야 한다. 커다란 조직에서 내가 하고 있는 일의 가치를 왜라는 질문으로 찾아야 하고, 그 가치를 위해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 것인지를 찾아야 하며, 그 일을 어떻게 수행해야할 지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조직이 직원 개개인의 자율성을 보장하고, 일의 재량권을 맡기는 것이지만, 그런 조직을 움직이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은 지금은, 우선 내가 일에 대한 소명을 찾을 작업부터 해나가야 할 것이다. 생계를 위해 직장을 다닐 수 밖에 없다면, 그리고 당장 직장을 그만둘 생각이 아니라면,,, 하루의 대부분을 단순히 돈을 위해서 딱하게 살수는 없지 않은가. 어쩌면, 현실에서의 정신승리를 위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 | 우리는 왜 일하는가 - ![]() 배리 슈워츠 지음, 박수성 옮김/문학동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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